29년이라는 세월을 언제나 최선을 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영부영 시간을 보낸 적도 있을 것이고, 포기한 세월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방향은 언제나 같았다.
단기적인 목표도 있었고, 장기적인 계획도 있었다.
실패한 적도 많았지만 성공한 경우도 많았다.
후퇴도 했고, 옆길으로 새기도 했다.
크게크게 전진도 해봤다.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물론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들도 있긴 있다.
그렇지만 결국에는 기어코 이루어냈다.
그런데 나는 29년동안 무얼 하고 있었나.
어마어마한 시간을 그냥 보내고 있었다.
인제 와서 그런걸 왜 하냐,
진작에 한번 해볼걸,
지금 하기엔 너무 늦었어...
그러면서 29년을 보냈다.
되돌아보면 후회만 한가득이다.
그런데도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진짜 큰일이다.
그걸 알면서도 이러고 있다.
그게 더 큰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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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주머니에서 나온 돈으로 먹고 입고 살면서..."
대학에 다니는 딸에게 아버지가 보낸 문자 내용이다. 욕설과 함께...
넷플릭스 드라마 속 얘기다.
문득 내가 이런 꼴을 애들한테 보여줬지 않나 싶어 덜컹했다.
"너희들한테 밥먹이고 옷사주고 학원도 보내주는데,
엄마 마빠 말도 안듣고 제멋대로 하는게 맞는거냐!"
나름 경제적인 겁근으로 너희들도 엄마 아빠한테 뭔가를 해줘야 하는거 아니냐고
했었지만, 이렇게 보니 정작 말도 안되는 개소리였나 싶다.
욕만 안했지, 내가 저 아버지하고 뭐가 다를까 싶다.
저 아버지는 그래도 건물주인데다 부자이기라도 하지...
되지도 않는 않는 유세를 떨었던게 창피하다.
1.
공부머리가 있었다. 아니, 상당했다.
강남 명문고에서도 인정받을 정도였다.
심지어 IQ도 굉장히 높았다. 3천명 전교생 중 제일 높았다.
그러나 공부는 지독히도 안했다.
시험 며칠 전부터 들여다보면 괜찮은 성적이 니왔다.
게다가 수능 모의고사는 공부를 안해도 손꼽히는 성적이 나왔다.
이러니 자만심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고, 그게 진짜 실력인줄 착각했다.
맨날 음악 듣고 영화 보고 책과 잡지에 푹 빠져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공부는 내가 더 많이 하는 줄 알았는데...집에서는 되게 열심히 하냐?"
"와~! 넌 맨날 소설만 보고 있어서 한심해 보였는데..."
고3 모의고사에서 2등했을때 5등을 했던 짝이 했던 말이다.
그 당시 그 학교는 반에서 1~2명은 당연하게, 혹은 3명까지 서울대 보냈었다.
5~6등 성적은 연고대 수준이었고, 15명~20명은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보냈다.
선생님도 당연히 알고 계셨다. 학교에서뿐 아니라 집에서도 공부를 안하는 것을...
그래도 내신은 좀 낮지만 모의고사에서 준수한 성적을 꾸준히 내고 있으니
서강대나 성균관대는 충분하다고 판단하셨던 듯 하다.
그러나 항상 실력은 중요한 순간에서 나온다.
수능에서는 그야말로 초토화된 성적을 받아오고
선생님과 부모님의 계획은 산산조각이 아니라 가루가 될 지경으로 부서졌다.
2.
몇년전 TV 뉴스에서 의사 인터뷰를 봤다.
왠지 낯익은 얼굴이었는데 이름을 보니 고교 동창이었다.
비교적 친했었고, 내 기억에서는 성적은 열손가락에 꼽히는 정도였다.
당연히 그 친구는 열심히 노력했고, 난 그렇지 않았다.
그 친구는 노력의 댓가로 꿈의 결실을 이루었고, 난 그저그런 회사원이 되었다.
3.
후회하고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엄밀히 얘기하면 내 재능을 살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나한테는 공부라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 재능을 십분 발휘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걸 못했기에 난 그냥 평범하게, 별 보람없이 세월 속에서 그냥 살아지고 있다.
4.
공부머리가 있다. 아니, 상당하다.
반포 학원가에서 인정받고 좀더 빨리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하나같이 말한다.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최소한으로 하고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며 자꾸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확실히 공부 재능이 있다.
그렇지만 나처럼 될까봐 심히 걱정된다.
지금 받아드는 훌륭한 성적이 자기 실력이라고 착각할까봐 걱정된다.
그렇다고 더 노력하라고, 진짜 실력이 아닐수도 있다고 다그칠 수도 없다.
5.
재능을 살려서 나와는 달리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았으혐 하는 것이
그 녀석에 대한 유일한 바램이다.
한 작가의 사망 기사를 봤다.
페터 비에리라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쓴 '파스칼 메르시어'로 기억되는 작가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사실 겉표지가 맘에 들었었고, 또 제목도 뭔가 있어보이기도 해서 샀던 책이었다.
그렇지만 첫 페이지를 보고나서는 '쉽지않은 책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첫 부분을 보면서 로맨스와 추리가 가미된 내용이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마저도 아니었으니,
재미는 포기하고 의무감을 다분히 가지고 읽어나가야 했었다.
난 사실 소설 내용은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에 몰입되면서 동화되는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설이 나를 설득하거나 이해를 구할 필요는 없지.
그들을 지켜보면서 내 감정이 어떻게 몰아다니는지 느끼면 되니까.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렵고 무겁다.
그럼에도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확실히 좋은 작품인건 확실하다.
작가의 이름을 듣고 작품을 떠올리면서 복기하고 추억하고 있으니.
담배도 안피우고, 당구도 안치고, PC방도 안다녔다.
연애도 안하고, 맛있는 음식에도 관심이 없었다.
지갑을 여는 대상은 술과 CD뿐이었다.
고등학생때는 더 그랬었다. 그때는 술도 안먹었으니까.
강남역에 타워레코드가 생긴 것이 너무나 기뻤었다.
곳곳에 놓여진 CD플레이어를 통해 청음을 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음악을 들으며 한두시간을 보냈었다.
약속장소는 항상 강남역이었고, 너무나도 일찍 도착해버리기가 일쑤였다.
희한하게 타워레코드에서는 CD를 서너장씩 사게 된다.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테이프에서 CD로 갈아탔다.
수백개의 테이프는 모두 CD로 다시 사서 모았다.
애지중지하던 워크맨(파나소닉이지만)을 서랍에 넣고,
동글동글하고 세련된 CD플레이어를 가방에 넣고 다녔다.
대여섯장의 CD를 넣은 (흠집이 날까 한없이 부드러운 천을 안에 덧댄) CD포켓도 옆에 넣었다.
2000년대 초반, 아이리버의 mp3로 갈아타도 CD는 열심히 모았다.
그때부터는 CD를 사면 320kbps 버전으로 mp3로 변환해서 mp3플레이어에 넣었다.
mp3가 아이폰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CD를 사고, 파일로 만들어서 보관했다.
시간이 날때면 벽면을 가득 채운 CD들을 훑어보면서 꺼내어 보고 다시 정리도 해보고,
들어보기도 했었다. 그 시간이 그렇게 좋았었다.
이딴걸 왜 샀나 싶기도 한 것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쌓인 먼지를 닦아주고 다시 꽂아주기도 하고,
똑같은 CD들이 있기도 했다. 특히 메탈리카의 블랙앨범은 세장이나 있기도 했다.
고등학생때에도, 대학생일때도, 직장에 다닐때에도, 결혼을 해도
어디를 가든지 귀에는 항상 이어폰을 꽂고 다녔었다.
예전엔 그랬었다.
간혹 한두장은 사긴 했었지만이젠 더이상 CD를 사지 않는다. 10년도 훨씬 넘었다.
오히려 가득 채우고 있던 CD들을 죄다 내다버렸다.
그렇다고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지는 않는다.
예전처럼 아이폰에 파일을 넣어서 듣는다.
오래된 파일들을 꺼내어 아이폰에 옮겨담는다.
저장해 놓은 오래된 하드디스크들도 제 역할을 못해서 거의 다 날려먹었다.
나이를 먹어 노인이 되어도 나의 CD와 책들은 내 곁에 영원히 있을 줄 알았었다.
그렇지만 현실은 달랐었다.
방 하나를 가득 채우는 것들은 나에게만 소중할 뿐이었다.
2년전 이사를 하면서 그들의 공간은 애들의 물건으로 채워져야 했다.
재활용으로, 당근으로 모두 떠나 보냈다.
허전함과 아쉬움, 야속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는 느낌을 그때서야 실감했다.
간혹 생각날때도 있었지만 2년동안 나는 그들이 없어도 잘 지냈다.
예전처럼 음악을 찾아서 듣지 않게 되고, 글을 읽는 재미도 줄었다.
나의 즐거움은 계속 사라지고 있지만, 어느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덤덤해지는 나이가 된 거겠지.
예전엔 그랬었는데...
꿈에 속편이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을까.
아내와 점심을 먹고 카페에 들어갔다.
지진으로 무너진 건물을 다시 세웠고, 무너진 흔적은 그대로 남겨놓은 건물이었다.
자리가 없어 넓직한 다인용 테이블에 앉았고, 곧이어 다른 커플이 들어와 옆에 앉았다.
남자는 안하무인이었다.
앉자마자 테이블에 발을 턱 걸쳤고, 여자가 눈치를 주니 그제서야 발을 내렸다.
그렇지만 벌러덩 누워버렸다.
기분이 나빠진 우리는 대충 마시고 나왔다.
나는 수업을 들으러 가야했고, 아내는 도서관으로 가기로 했다.
(깨어나서 생각해 보니, 우리는 학생이었고, 부부가 아니라 연인이었나 보다)
도서관은 15층(!)에 있고, 내 강의실은 14층이었다.
14층부터는 계단이 아니라 비스듬하게 경사로 만들어졌다.
아내는 윗길로 올라갔고, 나는 강의실을 찾아갔다.
그런데 아무리 가도 강의실이 안나온다.
강의실 문패를 보니 13-23, 13-24, 13-25... 되어 있었다.
"엇! 13층이었나??"
다시 돌아와서 14층으로 올라갔다. 올라가 보니 15층으로 가는 갈림길이 있었다.
경사로는 13층부터 시작했었나 하면서 강의실로 가는데...
여기도 13층이네??
갑자기 무서워져서 얼른 되돌아와서 13층으로 내려왔고, 다시 12층으로 내려왔다.
경비 아저씨가 보여서 14층이 어디냐고 이상한 질문을 했다.
지진으로 13층부터는 무너졌다고 하더니, 나를 생경한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나 역시 경비 아저씨가 그때 지진으로 죽은 사람인 듯 느껴졌고, 동시에 내가 죽은 사람인가 하는 의심도 들었다.
아내를 만나면 알 수 있을 것 같아 무작정 뛰어올라갔는데 갑자기 주위가 까맣게 변해갔다.
사방이 무너지는 것 같았지만 아내 생각에 힘껏 뛰었다.
길이 없어지고 벽도 사라지고 있는데 창문이 있길래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이상하게도 천천히 떨어지고 있는데 카페 건물의 지진 흔적이 생각났고,
그 때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뜬채로 꿈을 더듬고 있던 중, 14층 경사길이 생각났다.
몇주전, 아니 몇달전인지도 모르겠다.
그때도 15층에 도서관이었고, 난 14층 강의실에 놓고 온 가방을 가지러 가는 중에 깨어났었다.
뭘까..
뭘까...
천안에서 서울로 유학 온 막내이모는 왕언니의 집, 우리 가족과 함께 살았다.
무려 스물두 살 차이인 언니의 아들과는 겨우 열 살 차이였으니, 거의 누나뻘이었다.
그러니, 우리 부모님도 막내이모를 거의 큰 딸같이 보살폈다.
어릴때부터 조카들을 살뜰히 챙겼던 이모는 대학생이 되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매일같이 하교하면서 붕어빵이며 호떡, 순대 등 조카들 간식거리를 사들고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대학생이 무슨 돈이 있을까 싶기도 하다.
클래식을 좋아했던 이모 덕분에 나의 음악 청취는 클래식으로 시작했다.
이미 피아노 경력이 7~8년이었으니, 고전음악이 낯설지 않았던 초등학생 꼬마는 웅장한 오케스트라에 빠져들었다.
이모는 내 손을 잡고 집 근처의 예술의전당에 다녔다.
본인의 취미생활에 조카를 데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한달에 한두번씩 관현악단을 비롯해서 피아노 독주회 등 클래식 공연을 찾았다.
당연히 대학생 수준에서 감당할 수 있는 가장 저렴한 좌석을 골랐다.
무대 뒷쪽의 좌석이다.
그렇지만 난 그 좌석이 그렇게 좋았다.
남들은 모두 지휘자의 뒷모습만 보지만, 난 지휘자의 표정과 지휘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볼 수 있었다.
엄하면서도 자상하게, 강인하고 부드러운 몸짓과 눈길 등은 아무리 비싼 VIP석에서도 볼 수 없는 것들이다.
연주자들이 악보 넘기는 것도 볼 수 있고, 자기 파트가 아닐때 딴 짓 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연주에 열중하면서 그 속에 빠져드는 연주자들의 표정들을 보면 나도 더 깊이 음악에 빠져들어 가는 것 같았다.
심지어 약간 말을 보태자면 숨소리도 들릴만큼 거리도 상당히 가까웠다.
연주가 끝나면 지휘자는 앞에 있는 관객들을 보면서 몸짓을 멈추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럻수 밖에 없지...
그 순간이 그 좌석의 하이라이트였던 것 같다. 그때만큼은 나도 그 악단의 일원이었던 것 같은 착각이 들어다.
박수가 터지고 지휘자가 돌아서면서 사라지긴 하지만서도..
퇴장하면서 무대 뒷쪽의 관객들을 향해 손을 들어 인사하는 지휘자와 연주자들도 있다.
백건우 독주회가 잊혀지지 않는다.
공연이 끝나고 여러번 인사하고 퇴장할때까지 열심히 박수치고 있었다.
백건우 피아니스트가 열렬한 환호를 보내는 꼬마가 맘에 들었는지,
나를 가리키면서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눈을 마주치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리고 미소를 지으면서 들어가는 그 짧은 시간이 30여년이 지났음에도 잊을 수가 없었다.
연말에 아내와 합창단 공연 보러 예술의전당에 갔다.
돈 좀 써서 거의 중앙의, 무대 가까운 나름 좋은 좌석으로 예매했다.
무대 뒤의 좌석을 보니 새록새록 옛생각이 떠오른다.
길몽이었다!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옳다구나! 싶었다.
그 기운을 놓치지 말자는 일념으로 퇴근시간을 기다렸다.
저녁 같이 하자는 팀 동료를 뿌리치고 귀가길을 서둘렀다.
세군데가 있는데 어디로 갈까 지하철 속에서 내내 고민했다.
그래도 항상 가는 곳으로 가야지!
평소와는 달리 한장 더 샀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날이 왔고, 시간이 됐다.
그래도 '꿈은 꿈이지, 안될거야' 라고 미리미리 실망할 준비를 하고,
그래도 맘이 졸여 12시 넘어서야 슬쩍 꺼내봤다.
그래도 이정도면 길몽인데...
거대한 붉은 뱀이 나를 감싸고 입을 크게 벌리고 다가왔는데...
되게 생생했었는데...
아닌가....
간만에 김세황, 간만의 넥스트.
https://youtu.be/oqSN14hfaZ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