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부머리가 있었다. 아니, 상당했다.
강남 명문고에서도 인정받을 정도였다.
심지어 IQ도 굉장히 높았다. 3천명 전교생 중 제일 높았다.
그러나 공부는 지독히도 안했다.
시험 며칠 전부터 들여다보면 괜찮은 성적이 니왔다.
게다가 수능 모의고사는 공부를 안해도 손꼽히는 성적이 나왔다.
이러니 자만심이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차올랐고, 그게 진짜 실력인줄 착각했다.
맨날 음악 듣고 영화 보고 책과 잡지에 푹 빠져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공부는 내가 더 많이 하는 줄 알았는데...집에서는 되게 열심히 하냐?"
"와~! 넌 맨날 소설만 보고 있어서 한심해 보였는데..."
고3 모의고사에서 2등했을때 5등을 했던 짝이 했던 말이다.
그 당시 그 학교는 반에서 1~2명은 당연하게, 혹은 3명까지 서울대 보냈었다.
5~6등 성적은 연고대 수준이었고, 15명~20명은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보냈다.
선생님도 당연히 알고 계셨다. 학교에서뿐 아니라 집에서도 공부를 안하는 것을...
그래도 내신은 좀 낮지만 모의고사에서 준수한 성적을 꾸준히 내고 있으니
서강대나 성균관대는 충분하다고 판단하셨던 듯 하다.
그러나 항상 실력은 중요한 순간에서 나온다.
수능에서는 그야말로 초토화된 성적을 받아오고
선생님과 부모님의 계획은 산산조각이 아니라 가루가 될 지경으로 부서졌다.
2.
몇년전 TV 뉴스에서 의사 인터뷰를 봤다.
왠지 낯익은 얼굴이었는데 이름을 보니 고교 동창이었다.
비교적 친했었고, 내 기억에서는 성적은 열손가락에 꼽히는 정도였다.
당연히 그 친구는 열심히 노력했고, 난 그렇지 않았다.
그 친구는 노력의 댓가로 꿈의 결실을 이루었고, 난 그저그런 회사원이 되었다.
3.
후회하고 있다.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한다.
엄밀히 얘기하면 내 재능을 살리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나한테는 공부라는 특별한 재능이 있었다.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 재능을 십분 발휘해야 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걸 못했기에 난 그냥 평범하게, 별 보람없이 세월 속에서 그냥 살아지고 있다.
4.
공부머리가 있다. 아니, 상당하다.
반포 학원가에서 인정받고 좀더 빨리 시작했으면 좋았을 것 같다고 하나같이 말한다.
그러나 공부를 열심히 하지는 않는다.
최소한으로 하고 최대한의 효과를 거두고 있다.
이 녀석을 보고 있으며 자꾸 내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확실히 공부 재능이 있다.
그렇지만 나처럼 될까봐 심히 걱정된다.
지금 받아드는 훌륭한 성적이 자기 실력이라고 착각할까봐 걱정된다.
그렇다고 더 노력하라고, 진짜 실력이 아닐수도 있다고 다그칠 수도 없다.
5.
재능을 살려서 나와는 달리 자신감 넘치는 삶을 살았으혐 하는 것이
그 녀석에 대한 유일한 바램이다.
한 작가의 사망 기사를 봤다.
페터 비에리라고는 하지만 나에게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쓴 '파스칼 메르시어'로 기억되는 작가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사실 겉표지가 맘에 들었었고, 또 제목도 뭔가 있어보이기도 해서 샀던 책이었다.
그렇지만 첫 페이지를 보고나서는 '쉽지않은 책이겠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첫 부분을 보면서 로맨스와 추리가 가미된 내용이지 않을까 기대를 했지만 그마저도 아니었으니,
재미는 포기하고 의무감을 다분히 가지고 읽어나가야 했었다.
난 사실 소설 내용은 그렇게 와닿지는 않았다.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에 몰입되면서 동화되는게 이해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소설이 나를 설득하거나 이해를 구할 필요는 없지.
그들을 지켜보면서 내 감정이 어떻게 몰아다니는지 느끼면 되니까.
지루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렵고 무겁다.
그럼에도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확실히 좋은 작품인건 확실하다.
작가의 이름을 듣고 작품을 떠올리면서 복기하고 추억하고 있으니.
담배도 안피우고, 당구도 안치고, PC방도 안다녔다.
연애도 안하고, 맛있는 음식에도 관심이 없었다.
지갑을 여는 대상은 술과 CD뿐이었다.
고등학생때는 더 그랬었다. 그때는 술도 안먹었으니까.
강남역에 타워레코드가 생긴 것이 너무나 기뻤었다.
곳곳에 놓여진 CD플레이어를 통해 청음을 할 수 있었다.
이런저런 음악을 들으며 한두시간을 보냈었다.
약속장소는 항상 강남역이었고, 너무나도 일찍 도착해버리기가 일쑤였다.
희한하게 타워레코드에서는 CD를 서너장씩 사게 된다.
대학생이 되면서부터 테이프에서 CD로 갈아탔다.
수백개의 테이프는 모두 CD로 다시 사서 모았다.
애지중지하던 워크맨(파나소닉이지만)을 서랍에 넣고,
동글동글하고 세련된 CD플레이어를 가방에 넣고 다녔다.
대여섯장의 CD를 넣은 (흠집이 날까 한없이 부드러운 천을 안에 덧댄) CD포켓도 옆에 넣었다.
2000년대 초반, 아이리버의 mp3로 갈아타도 CD는 열심히 모았다.
그때부터는 CD를 사면 320kbps 버전으로 mp3로 변환해서 mp3플레이어에 넣었다.
mp3가 아이폰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CD를 사고, 파일로 만들어서 보관했다.
시간이 날때면 벽면을 가득 채운 CD들을 훑어보면서 꺼내어 보고 다시 정리도 해보고,
들어보기도 했었다. 그 시간이 그렇게 좋았었다.
이딴걸 왜 샀나 싶기도 한 것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쌓인 먼지를 닦아주고 다시 꽂아주기도 하고,
똑같은 CD들이 있기도 했다. 특히 메탈리카의 블랙앨범은 세장이나 있기도 했다.
고등학생때에도, 대학생일때도, 직장에 다닐때에도, 결혼을 해도
어디를 가든지 귀에는 항상 이어폰을 꽂고 다녔었다.
예전엔 그랬었다.
간혹 한두장은 사긴 했었지만이젠 더이상 CD를 사지 않는다. 10년도 훨씬 넘었다.
오히려 가득 채우고 있던 CD들을 죄다 내다버렸다.
그렇다고 스트리밍 서비스를 이용하지는 않는다.
예전처럼 아이폰에 파일을 넣어서 듣는다.
오래된 파일들을 꺼내어 아이폰에 옮겨담는다.
저장해 놓은 오래된 하드디스크들도 제 역할을 못해서 거의 다 날려먹었다.
나이를 먹어 노인이 되어도 나의 CD와 책들은 내 곁에 영원히 있을 줄 알았었다.
그렇지만 현실은 달랐었다.
방 하나를 가득 채우는 것들은 나에게만 소중할 뿐이었다.
2년전 이사를 하면서 그들의 공간은 애들의 물건으로 채워져야 했다.
재활용으로, 당근으로 모두 떠나 보냈다.
허전함과 아쉬움, 야속함이 물밀듯이 밀려왔다는 느낌을 그때서야 실감했다.
간혹 생각날때도 있었지만 2년동안 나는 그들이 없어도 잘 지냈다.
예전처럼 음악을 찾아서 듣지 않게 되고, 글을 읽는 재미도 줄었다.
나의 즐거움은 계속 사라지고 있지만, 어느새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모든 것들이 덤덤해지는 나이가 된 거겠지.
예전엔 그랬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