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를 꼰 채 열심히 키보드를 두드리던중 발끝에 걸려있던 슬리퍼가 벗겨졌다.
보지도 않고 발 끝으로 찾아서 또 발끝으로 신으려고 했지만, 떨어지면서 뒤집혔는지 영 발이 들어가질 않는다.
할수없이 책상 밑으로 들어가 슬리퍼를 다시 뒤집어 놓고 의자에 다시 앉았다.
미끄러지듯이 슬리퍼 속에 발을 넣고 좀전과 달리 왼쪽 다리를 꼰채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문득 뒤집혀진 슬리퍼가 다시 생각났다. 뒤축이 다 닳아서 드러난 하얀 고무가 걸렸다.
자세히 보니 한쪽의 발등을 덮는 밴드 옆이 다 튿어진 채 힘겹게 붙어있었다. 미처 몰랐다.
이 슬리퍼, 굉장히 오래 신었다. 2000년 10월, 내가 첫 직장 출근할때부터 항상 내 책상에 놓여있었다.
시원하게 신으려 그해 여름에 샀고, 몇달뒤 가장 깨끗하다는 이유로 차출되었다.
여러번 회사를 옮겼음에도 항상 이 슬리퍼는 가장 챙겼다. 하도 오래 신었더니 내 발모양이 고스란히 찍혀있다.
그래도 한때 유명세를 떨쳤던 'LA GEAR'다. 무광 블랙의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것이 모양도 나름 세련됐다.
사실 다 낡고 닳은 슬리퍼를 버리려고 몇번 생각했었다.
마트에 들렀을때도 마음에 드는 새 것을 찾기도 한 것도 여러 차례..
어느 것도 이 슬리퍼 만큼 내 발을 편하게 해줄 수는 없을 것만 같았고
'좀 더 신어보자!'라며 은퇴를 연장시켰다.
그러고보니 난 이 슬리퍼를 굉장히 사랑했었나 보다.
하지만 이제 정말 이 슬리퍼를 버려야겠다.
더이상 흉한 모습이 되기 전에..아직까지 슬리퍼의 모습이 남아있는 동안에..
아마 신발장에서 가장 깨끗한 슬리퍼를 꺼내와 가져올 것이다.
아니면 마트에서 비슷한 모습의 것을 찾아올 것이다.
그래도 한동안은 이 LA GEAR 슬리퍼와 비교하겠지.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